[유차영의 아랑가]
1959년 대전부르스
목포행 33열차를 타면서 이별하는 연인
최치수/김부해/안정애 // 강태관
1990년 부산 출생 강태관, 판소리를 유행 가락으로 녹여내는 깊은 올림의 가수. 2020년 내일은 미스터트롯에서 준결승까지 진출했던 그가 마스터 심사위원 조영수의 소속사 넥스타엔터테인먼트)로 직행했다.
예선전 당시 장윤정 마스터는 "지금까지 출연자 중 가장 잘한다"며 극찬을 쏟아내 큰 관심을 받았다. 그때 강태관이 푸른 노래가 안정애가 부른 <대전부르스>다. 이 노래가 발표된 29분 뒤에 강태관이 세상에 나왔다.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떠나가는 새벽열차 대전발 영시 오십분/세상은 잠이 들어 고요한 이 밤 / 나만이 소리치며 울 줄이야/ 아- 붙잡아도 뿌리치는 목포행 완행열차//기적소리 슬피 우는 눈물의 플랫폼/무정하게 떠나가는 대전발 영시 오십 분 / 영원히 변치 말자 맹세했건만 / 눈물로 헤어지는 쓰라린 심정 / 아- 보슬비에 젖어오는 목포행 완행열차 (가사 전문).
<대전부르스> 노래는 1959년생, 원곡 가수 안정애는 1936년생, 이 노래를 절창한 가수는 1990년생. 중앙대를 거쳐 2010년 제36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판소리 일반부에서 장원을 한 20년 경력의 국악인. 이 상으로 군대도 면제를 받았다. 그는 왜 트로트 고속도로로 운전대를 지향하는가. 그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대중성·통속성의 에너지 때문이 아닐까. 통성처럼 내지르는 가다듬어진 목청도 듣는 이들의 가슴을 짓이긴다. 심사위원 조영수 작곡가는 '강태관을 최고로 만들 것'이라는 속내를 심사평으로 꺼내어 흔들었다. 그는 강태관을 제대로 멘토링 해서 트로트에서도 최고로 만들 것이라 했다.
목포행 33열차, 중간 정차역이던 대전역에서의 이별 서정. <대전부르스>는 이 서울발 목포행 완행열차가 낳은 곡조다. 1959년 2월부터 1년여간 운행된 증기 열차가 노래의 모티브다. 그 당시 열차 번호가 짝수이면 서울행, 홀수이면 지방행이었다. 일본에서 주로 사용하는 형식인데, 우리도 흡사하다.
1959년 어느 날 밤 12시40분경, 역 광장으로 산책을 나온 한 사내의 시선이 대전역 플랫폼 가스등 아래 멎는다. 그곳에는 청춘남녀가 두 손을 꼭 잡고 눈물을 글썽이며 이별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북쪽에선 남자를 싣고 갈 목포행 0시 50분 완행열차가 홈으로 들어오고, 마침내 둘은 생이별을 한다. 사내는 곧바로 여관으로 되돌아와서 이 장면을 시로 쓴다. 14년여를 열차 승무원을 한 이력을 가진 작사가 최치수. 여기에 김부해가 애간장이 녹아내리는 블루스 선율을 얹고 신인가수 안정애의 목소리를 타고 세속으로 녹아들어간다.
최치수. 그는 당시 신세기레코드사 사업부에서 일을 하고 있었으며, 지방 출장을 위해 대전역 인근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의 가사를 받은 김부해는 블루스로 리듬을 정한 뒤 3시간여의 작업 끝에 곡을 완성하여 안정애가 녹음을 한다. 이 노래는 출반 3일 만에 주문이 쇄도했고 회사 창립 이래로 최대의 대박을 쳤다. 당시 23세 본명 안순애, 안정애는 블루스풍의 트로트로 인기를 모았으며, 이 노래가 대표곡이다. 안정애는 1950년대 후반 고복수가 운영하던 동화예술학원에서 이미자와 같이 노래 공부를 하였으며, 고복수의 추천으로 가요계에 입문한다.
이 노래는 1963년 이종기 감독이 최무룡 엄앵란· 신성일을 주연으로 제작한 영화 <대전발 0시 50분>의 주제곡이 된다. 줄거리는 장래를 언약한 여인이 있는 주인공 육군소위는 정식으로 약혼할 것을 독촉 받는다. 하지만 그는 몽매에도 잊지 못하는 누님을 찾은 뒤에 약혼식을 올리기를 희망하며 하루하루 미룬다. 그러던 어느 날 어렵게 누님을 만나지만, 그 누님이 3류 화류 바 여급으로 전락해 있었다. 이때 그에게 전방수색대 임무가 떨어지는데, 그는 세상을 비관하며 죽음으로써 수색정찰 임무를 완수한다.
1959년 2월 제33열차로 탄생한 이 기차는 밤 8시 45분에 서울을 출발, 대전에 0시 40분 도착, 다시 목포를 향해 0시 50분에 출발했다. 지금은 서대전역을 통해 호남선이 다니지만 당시는 대전역을 거쳐 갔다. 이 열차를 이용한 사람들은 대전역 인근 시장에서 광주리 물건을 팔던 농사꾼이거나 술에 얼큰히 취해 막차를 기다리던 지방 사람들이었다. 이 열차는 지금은 없다. 생긴 지 1년 만인 1960년 2월 대전발 03시 05분 차로 시간이 변경되면서 짧은 수명을 다 했다.
작사·작곡가는 이후 레코드사까지 운영하였지만 지금은 고인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대전역 부근 허름한 선술집에서는 쉰 목소리의 이 노래가 흘러나온다. 역사 속의 연결고리다.
대전은 1975년 경부선 개통으로 대도시화가 되며, 1912년 호남선을 개통하면서 교통의 요충지로 발전했다. 대전시 동구 소제동 철도관사촌은 대전 철도 역사의 현장이다. 1930년대 일본인 철도기술자들의 숙소로 조성된 이곳은 현재 40채 정도가 남아 있다. 일본제국주의 강점기에 지어진 관사촌으로는 전국 최대 규모다. 서울 신용산의 명칭도 조선총독부 철도국 소속 일본인 직원들의 숙소를 지으면서 붙여진 이름임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얼마 전 대전역 광장에 있던 <대전부르스> 노래비가 철거되었다. 세칭 유명 인사들의 유적비 건립이 바이러스처럼 전국으로 번져가는 트렌드와는 상반된 현상이다. 이 노래비는 1999년 철도 창설 100주년과 <대전부르스> 발표 40년을 맞아 대전 우송대 협찬으로 건립됐었다. 관리 부실과 노숙자들의 폐행이 명목상의 철거 이유이지만, 내면적으로는 노래를 부른 가수 이름 색인을 놓고 10여 년째 가수와 추진위원회 측이 대립해 온 내홍이 있었다. 최초 발표 가수와 리메이크 가수 이름 색인과 관련한 상반된 견해가 원인이란다.
<대전부르스> 원곡 가수 안정애는 1936년 경남 하동의 부잣집에서 태어났다. 워낙 집이 크고 부자라 하동에 연예인 공연을하러 올 때면 그의 집에서 수시로 머물렀고, 자연스럽게 연예인과의 친분도 쌓을 수 있었고 가수가 되겠다는 꿈도 키울 수 있었단다.
그는 블루스 가수였다. 밤비의 부르스, 대전부르스, 순정부르스, 비정 부르스, 여인부르스 등이 그녀가 남긴 노래, 트로트의 블루스 시리즈다.
[유차영의 아랑가]
1959년 대전부르스
목포행 33열차를 타면서 이별하는 연인
최치수/김부해/안정애 // 강태관
1990년 부산 출생 강태관, 판소리를 유행 가락으로 녹여내는 깊은 올림의 가수. 2020년 내일은 미스터트롯에서 준결승까지 진출했던 그가 마스터 심사위원 조영수의 소속사 넥스타엔터테인먼트)로 직행했다.
예선전 당시 장윤정 마스터는 "지금까지 출연자 중 가장 잘한다"며 극찬을 쏟아내 큰 관심을 받았다. 그때 강태관이 푸른 노래가 안정애가 부른 <대전부르스>다. 이 노래가 발표된 29분 뒤에 강태관이 세상에 나왔다.
잘 있거라 나는 간다 이별의 말도 없이/떠나가는 새벽열차 대전발 영시 오십분/세상은 잠이 들어 고요한 이 밤 / 나만이 소리치며 울 줄이야/ 아- 붙잡아도 뿌리치는 목포행 완행열차//기적소리 슬피 우는 눈물의 플랫폼/무정하게 떠나가는 대전발 영시 오십 분 / 영원히 변치 말자 맹세했건만 / 눈물로 헤어지는 쓰라린 심정 / 아- 보슬비에 젖어오는 목포행 완행열차 (가사 전문).
<대전부르스> 노래는 1959년생, 원곡 가수 안정애는 1936년생, 이 노래를 절창한 가수는 1990년생. 중앙대를 거쳐 2010년 제36회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판소리 일반부에서 장원을 한 20년 경력의 국악인. 이 상으로 군대도 면제를 받았다. 그는 왜 트로트 고속도로로 운전대를 지향하는가. 그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대중성·통속성의 에너지 때문이 아닐까. 통성처럼 내지르는 가다듬어진 목청도 듣는 이들의 가슴을 짓이긴다. 심사위원 조영수 작곡가는 '강태관을 최고로 만들 것'이라는 속내를 심사평으로 꺼내어 흔들었다. 그는 강태관을 제대로 멘토링 해서 트로트에서도 최고로 만들 것이라 했다.
목포행 33열차, 중간 정차역이던 대전역에서의 이별 서정. <대전부르스>는 이 서울발 목포행 완행열차가 낳은 곡조다. 1959년 2월부터 1년여간 운행된 증기 열차가 노래의 모티브다. 그 당시 열차 번호가 짝수이면 서울행, 홀수이면 지방행이었다. 일본에서 주로 사용하는 형식인데, 우리도 흡사하다.
1959년 어느 날 밤 12시40분경, 역 광장으로 산책을 나온 한 사내의 시선이 대전역 플랫폼 가스등 아래 멎는다. 그곳에는 청춘남녀가 두 손을 꼭 잡고 눈물을 글썽이며 이별을 아쉬워하고 있었다. 북쪽에선 남자를 싣고 갈 목포행 0시 50분 완행열차가 홈으로 들어오고, 마침내 둘은 생이별을 한다. 사내는 곧바로 여관으로 되돌아와서 이 장면을 시로 쓴다. 14년여를 열차 승무원을 한 이력을 가진 작사가 최치수. 여기에 김부해가 애간장이 녹아내리는 블루스 선율을 얹고 신인가수 안정애의 목소리를 타고 세속으로 녹아들어간다.
최치수. 그는 당시 신세기레코드사 사업부에서 일을 하고 있었으며, 지방 출장을 위해 대전역 인근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의 가사를 받은 김부해는 블루스로 리듬을 정한 뒤 3시간여의 작업 끝에 곡을 완성하여 안정애가 녹음을 한다. 이 노래는 출반 3일 만에 주문이 쇄도했고 회사 창립 이래로 최대의 대박을 쳤다. 당시 23세 본명 안순애, 안정애는 블루스풍의 트로트로 인기를 모았으며, 이 노래가 대표곡이다. 안정애는 1950년대 후반 고복수가 운영하던 동화예술학원에서 이미자와 같이 노래 공부를 하였으며, 고복수의 추천으로 가요계에 입문한다.
이 노래는 1963년 이종기 감독이 최무룡 엄앵란· 신성일을 주연으로 제작한 영화 <대전발 0시 50분>의 주제곡이 된다. 줄거리는 장래를 언약한 여인이 있는 주인공 육군소위는 정식으로 약혼할 것을 독촉 받는다. 하지만 그는 몽매에도 잊지 못하는 누님을 찾은 뒤에 약혼식을 올리기를 희망하며 하루하루 미룬다. 그러던 어느 날 어렵게 누님을 만나지만, 그 누님이 3류 화류 바 여급으로 전락해 있었다. 이때 그에게 전방수색대 임무가 떨어지는데, 그는 세상을 비관하며 죽음으로써 수색정찰 임무를 완수한다.
1959년 2월 제33열차로 탄생한 이 기차는 밤 8시 45분에 서울을 출발, 대전에 0시 40분 도착, 다시 목포를 향해 0시 50분에 출발했다. 지금은 서대전역을 통해 호남선이 다니지만 당시는 대전역을 거쳐 갔다. 이 열차를 이용한 사람들은 대전역 인근 시장에서 광주리 물건을 팔던 농사꾼이거나 술에 얼큰히 취해 막차를 기다리던 지방 사람들이었다. 이 열차는 지금은 없다. 생긴 지 1년 만인 1960년 2월 대전발 03시 05분 차로 시간이 변경되면서 짧은 수명을 다 했다.
작사·작곡가는 이후 레코드사까지 운영하였지만 지금은 고인이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대전역 부근 허름한 선술집에서는 쉰 목소리의 이 노래가 흘러나온다. 역사 속의 연결고리다.
대전은 1975년 경부선 개통으로 대도시화가 되며, 1912년 호남선을 개통하면서 교통의 요충지로 발전했다. 대전시 동구 소제동 철도관사촌은 대전 철도 역사의 현장이다. 1930년대 일본인 철도기술자들의 숙소로 조성된 이곳은 현재 40채 정도가 남아 있다. 일본제국주의 강점기에 지어진 관사촌으로는 전국 최대 규모다. 서울 신용산의 명칭도 조선총독부 철도국 소속 일본인 직원들의 숙소를 지으면서 붙여진 이름임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다.
얼마 전 대전역 광장에 있던 <대전부르스> 노래비가 철거되었다. 세칭 유명 인사들의 유적비 건립이 바이러스처럼 전국으로 번져가는 트렌드와는 상반된 현상이다. 이 노래비는 1999년 철도 창설 100주년과 <대전부르스> 발표 40년을 맞아 대전 우송대 협찬으로 건립됐었다. 관리 부실과 노숙자들의 폐행이 명목상의 철거 이유이지만, 내면적으로는 노래를 부른 가수 이름 색인을 놓고 10여 년째 가수와 추진위원회 측이 대립해 온 내홍이 있었다. 최초 발표 가수와 리메이크 가수 이름 색인과 관련한 상반된 견해가 원인이란다.
<대전부르스> 원곡 가수 안정애는 1936년 경남 하동의 부잣집에서 태어났다. 워낙 집이 크고 부자라 하동에 연예인 공연을하러 올 때면 그의 집에서 수시로 머물렀고, 자연스럽게 연예인과의 친분도 쌓을 수 있었고 가수가 되겠다는 꿈도 키울 수 있었단다.
그는 블루스 가수였다. 밤비의 부르스, 대전부르스, 순정부르스, 비정 부르스, 여인부르스 등이 그녀가 남긴 노래, 트로트의 블루스 시리즈다.
글·사진 : 유차영(한국아랑가연구원장/글로벌사이버대 특임교수/경기대학교서비스경영전문대학원 산학책임교수/대중가요 유행가스토리텔러)